유언과 사인증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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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을 하려면 매우 엄격한 방식을 지켜야 한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방식 중에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유언은 무효가 된다. 가령 자필로 유언장을 작성하였는데, 작성한 일자를 적으면서 연도와 월은 적었으나 몇일인지 날짜를 적지 않았다면 유언은 무효가 된다.

 

유언이 이와 같이 무효가 된다면 그것으로 완전히 끝인가? 예를 들어 부친이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 5억 원을 딸에게 주라고 유언장을 작성하였는데 그만 날짜를 적지 않아서 무효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럴 경우 딸은 5억 원을 전해 받을 수 없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는 경우를 나누어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부친이 딸이 모르게 유언장을 작성해 두고 돌아가실 때까지 딸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채 장롱 속에 보관한 경우를 상정해 보자. 딸은 부친이 돌아가신 후 유언장을 보고 부친이 자신에게 5억 원을 주라고 한 사실을 알게 된다. 딸은 부친의 마음을 알고 감동하겠지만 애석하게도 이럴 경우에는 딸은 5억 원을 온전히 가지지 못한다. 딸은 5억 원을 상속재산에 포함시켜서 다른 상속인들과 함께 상속분에 따라서 상속을 받게 된다.

 

다른 가정을 해 보자. 부친이 딸에게 5억 원을 주겠다고 유언장을 작성한 뒤 딸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내가 죽으면 5억 원을 가지고 가라"라고 말했던 경우를 상정해 보자. 그리고 딸이 아버지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고 치자. 이런 경우에는 비록 유언장이 무효가 되더라도 딸은 부친의 뜻대로 5억 원을 혼자서 온전히 가질 수 있다. 부친과 딸 사이에 증여계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딸은 유언장을 근거로 5억 원을 청구할 수 없지만, 부친과 체결한 증여계약을 근거로 5억 원을 청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누군가가 자신이 죽으면 누구에게 무엇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사인증여’라고 한다. 그리고 유언장을 작성하여 누군가에게 재산을 주는 것을 ‘유증’이라고 한다. 사인증여와 유증은 모두 증여한 사람이 사망해야 효력이 발생하므로 그 효력 또는 효용성이 매우 비슷하다.

 

그렇지만 유증은 유증을 하는 사람이 유증을 받는 사람과 아무런 협의나 접촉, 대화 없이 혼자서 하는 행위다. 이에 비해 사인증여는 증여자와 받는 사람(이를 ‘수증자’라고 한다)이 서로 약속하는 행위다. 그리고 이런 약속은 반드시 계약서를 작성하여 서류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말로 해도 된다. 그 말에 어떤 방식도 정해진 것이 없다. 그냥 어떤 재산을 누구에게 주겠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유증과 사인증여는 이처럼 법률적으로 성립하는 과정에 차이가 있다.

 

우리가 가정한 사례로 다시 돌아가 보자. 부친이 딸이 모르게 유언장을 작성해 두고 돌아가실 때까지 딸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채 장롱 속에 유언장을 보관한 경우에는 오직 유증만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유증이 방식을 지키지 않아서 무효가 되었으므로 딸은 부친이 자신에게 주라고 한 5억 원을 달라고 할 아무런 근거가 없어진다.

 

이와는 달리 부친이 딸에게 5억 원을 주겠다고 유언장을 작성한 뒤 딸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내가 죽으면 5억 원을 가지고 가라"라고 말했고, 딸도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면 부친(증여자)과 딸(수증자) 사이에는 부친이 사망하면 효력이 발생하는 사인증여계약이 체결된 것이다. 이 경우에는 유증도 있고, 사인증여도 있다. 따라서 유증이 무효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방식을 요구하지 않는 사인증여는 유효하다. 그러므로 딸은 사인증여를 근거로 해서 5억 원을 청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유언장의 작성에 너무 부담을 드린 것 같아서 유언이 무효라도 유언하고자 했던 목적이 달성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기 위해 써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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