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와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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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슬픈 것이 아니다. 오직 내가 사랑한 사람, 그리고 나에게 선한 영향력을 준 사람의 죽음만이 내게 슬픈 일이다. 
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의 죽음은 내게 큰 슬픔을 주지 않는다. 물론,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의 죽음이 마치 내가 아는 사람의 죽음인 양 슬플 수 있고, 트라우마를 동반한 사회적 죽음이 사회공동체에 속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잘 알지 못하는 개인의 죽음은 그렇지 않다. 
친구 부모의 죽음이 내게 슬픈 마음을 안겨준다면 아마도 친구 부모에게 따뜻한 대접을 받았거나 아니면 내 친구의 슬픔에 감정을 이입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렇다면 법적으로 맺어진 가족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고부간의 갈등이 심하다. 서양의 문화에서도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지만,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연구에 의하면, 시어머니가 죽고 난 후 며느리들이 겪는 슬픔의 본질은 후회감이고 죄책감이다. 며느리들 뿐이겠는가? 모든 자식들의 마음일 것이다. 
‘좀 더 잘할걸’하는 후회와 죄책감은 아무리 부모에게 잘했다 한들 들게 되는 마음이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은 많은데 살아가면서 부모에게 갚으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는가 보다. 하지만, 부모가 죽고 난 후에 깨달아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지) 子欲養而親不待(자욕양이친부대)라는 말이 있다. 

이는 ‘나무는 고요 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부모를 봉양하려고 하나 기다려 주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부모가 죽은 후에 효도하려 해도 부모는 계시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적인 모습과 달리 부모에게 학대를 받았거나 버림받은 경우는 양상이 다르다. 

오히려 ‘잘 죽었다’라고 생각하는 자녀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도 오래가지는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양가감정으로 혼란을 겪는다. 해방감 죄책감, 안도감과 수치심 등의 양가감정은 오랫동안 마음을 괴롭히게 될 수 있다. 

이렇게 부모와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은 채 부모가 죽게 된다면 용서와 화해의 시간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알렌 휴 콜 박사의 책, 『굿모닝: 알렌박사가 말하는 슬픔치유』(윤득형 역)을 보면 친구 헨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헨리는 한 잡지에 고인이 된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기록하였다. 둘은 좋은 관계였다. 그들은 늘 함께하길 즐겼고, 여행도 함께 하며 잘 지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헨리는 아버지가 했던 말로 인해 큰 상처를 입었고 그 때문에 몇 년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 때문에 생겨난 이 고통을 아버지에서 꺼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가 죽은 몇 주 후부터, 헨리는 자주 악몽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헨리는 그의 아버지를 용서하기 위해 기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사랑하는 주님,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용서합니다. 아버지가 제게 상처를 주었던 난폭한 말들을 용서합니다. 부디, 주님도 그를 용서해 주시기 빕니다.” 
그 후 그는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확신했고,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꿈에 아버지와 함께 여행하며 웃고 즐기는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용서는 우리가 고통당했던 불의한 일들을 잊거나, 눈감아 주거나, 축소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과정이고, 치유가 우선이다. 
분노를 품었다면 그것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파괴적인 방식의 표출이 아닌 적합하게 분노를 품으면서도 표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준비가 됐을 때 용서를 선언하는 것이 좋다.

 

몇 달 전 오랜만에 8회기 대면 개인상담을 진행했다. 몇 해 전에 병으로 남편과 사별한 여성 내담자였다. 
남들보다 조금 늦은 결혼에 자녀 없이 지내면서 부부 사이가 매우 좋은 커플이었다. 
하지만, 시부모들과의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더군다나 남편이 항암치료를 받을 당시에도 시부모들은 철없는 행동을 했고, 
내담자는 시부모에 대한 분노의 마음이 생겼다. 결국, 아들은 치료 중에 죽게 되었다. 
아들의 병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후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었다. 무슨 이유인지, 어떤 마음인지는 알 수 없다.

 

내담자는 처음 ‘억울하다’라는 표현을 많이 했다. 그 억울함은 남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할 수 없게 만드는 큰 장벽이었다. 
처음 3회기까지 계속해서 당시의 상황과 시부모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만 이야기 했고, 남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죽은 시아버지를 향해 따져 묻을 수도, 대답을 들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녀의 분노는 가슴 속 깊이 쌓이고 묻혀 마음의 짐이 되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죽은 사람에 대한 용서’에 대한 말을 슬쩍 꺼내보았다. 
용서는 자신을 위한 것이며, 죽은 시아버지가 아직도 내담자의 마음을 조정하고, 사랑했던 남편의 애도를 가로막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 주에 온 내담자는 그 말을 되새겨 보았다고 한다. 죽은 시아버지가 남편을 애도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용서’는 못해도 ‘이해’는 하려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용서의 시작은 ‘이해’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용서의 과정에 들어선 것이다. 

 

용서는 가해자의 참회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기에 죽은 사람도 용서가 가능하다. 용서는 전적으로 나를 위한 것이며, 치유의 과정이 전제되어야 하며, 점진적이어야 한다. 
용서했다고 해도 불쑥 이전의 감정이 올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치유의 과정에서는 감정표현이 중요하다. 이로써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감정에서 벗어나게 한다. 

감정표현에 실패한다면, 감정적으로뿐 아니라, 관계적, 신체적, 행동적, 영적으로 파괴적인 잠재성을 지니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감추고 숨기는 것보다, 내 고통을 분명하게 표현할 때, 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기에 감정을 직면하고 슬픔과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면밀히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목소리를 내지 못한 감정들은 더욱 강화되고 파괴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이러한 감정들을 내면에 잠재우고 있거나, 의식 밖으로 밀어버리려고 한다면, 오히려 감정들이 우리 자신의 삶을 집어삼킬 수도 있다. 
표현되지 않는 분노는 가장 파괴적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기에 필요하다면, 용서의 과정을 서서히 밟아가는 것도 좋고, 치유의 한 과정으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안전한 환경에서, 신뢰할 만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럴만한 사람이 없다면, 그림 그리기, 시 쓰기, 음악 등 예술적인 방법으로 표현해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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